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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산-수렴-발산, 주식투자, 애자일, 에너지 레벨, 그리고 나

굉장히 중구난방하고 충분히 정제되지 않은 긴 글이다.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하나로 정리되진 않는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조금이라도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 기억하기 위해 블로그에 가볍게(?) 쓴다.

발산, 수렴, 그리고 발산

성공한 창업가와 창작자들에 대한 연구(Effectuation)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Exploration + Exploitation이라는 패턴을 가진다고 했다.

  • Exploration: 발산하기. 어떤 시도가 성공할지, 즉 무엇에 고객들이 열렬히 반응하고 본인도 크게 성장할지 잘 모르는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일단 다양한 시도를 해보면서 넓게 탐색한다. (e.g., 다양한 화풍으로 그림을 그려서 여러 지역의 미술관에서 전시한다. 다양한 주제와 작풍으로 습작을 써서 여러 군데 투고한다)
  • Exploitation: 수렴하기. 어떤 시도 하나가 ‘터져서’ 물이 들어오면 거기에 집중해 열심히 노를 젓는다. (e.g., 이 스타일에 고객들이 반응하니까 유사한 그림을 많이 그린다. 이 키워드에 독자들이 반응하니까 관련된 키워드를 더 발굴하고 제목과 소제목에 활용한다)

완전히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나도 작년 말부터 이와 비슷한 패턴으로 움직였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발산-수렴이 아니라 발산-수렴-발산이다.

  • 발산: 시각화, GPT, 코칭, 양치질, 인터뷰, 공모주와 주식투자 등 여러 주제에 동시에 힘을 쏟으며 폭주기관차처럼 많은 활동을 했다. ‘터지는 거 찾기’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여러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N타 1피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육아와 회사 일도 열심히 했는데 이것들은 1피를 위한 N타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 수렴: 점차 ‘CTA(인지작업 분석)를 이용한 디버깅 전문가 인터뷰’라는 구체적인 주제로 내 관심사와 에너지가 모였다. CTA에 대한 공부와 훈련이 내 삶의 여러 측면에 복리 이득을 준다는 점에서, 1타 N피 라고 볼 수 있다.
  • 발산: 여전히 여러가지 활동을 동시에 하고 있지만 그 모든 활동이 어떤 형태로든 이 ‘CTA + 디버깅’ 키워드와 연관되어 있다. 이 모든 게 나의 CTA 역량을 높인다는 점에서, 다시 N타 1피 다.
    • 여러 디버깅 전문가들을 만나서, 인지작업 분석(CTA)을 이용해 인터뷰하며 소프트웨어 문제와 일상의 문제를 발견/진단/해결하는 패턴을 배운다.
    • 이 경험을 정리해서 블로그에 ‘디버깅 전문가를 만나다’라는 프리미엄 컨텐츠로 올려 구독 수입을 얻는다.
    • ‘디버깅 전문가를 만나다’를 주제로 콜로소에서 라이브 강연을 했고 VOD 판매를 시작했다. 올해 인프콘에서도 디버깅을 주제로 발표 제안이 왔다.
    • 디버깅 전문가에게 배운 패턴이 회사 업무와 일상의 작업으로 전이되어 점점 더 생산성이 올라간다.
    • CTA 논문을 읽고, 매주 AC2 디스코드에서 CTA 연습모임에 참여한다. GPTs를 만들 때도 CTA를 활용하고, 컨설팅과 코칭에서도 CTA를 아주 적극적으로 쓰고 있다.
    • ‘디버깅 전문가를 만나다’를 책으로 만들기, 전문가 인터뷰를 주제로 교육 만들기 등도 고려 중.

이게 또 무언가로 수렴될 수도 있으리라. 발산이 완전히 끝나고 수렴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고, 발산-수렴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계속 중첩되는 싸이클이다. 완전히 다른 발산-수렴이 만들어졌다가 기존 것과 합쳐질 수도 있겠고.

발산, 수렴, 그리고 주식투자와 애자일

올해 초부터 시작한 여러 활동 중 하나는 주식투자 스터디다. 초보자였던 나는, 괜찮아 보이는 종목을 들을 때마다 (종목과 나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크게크게 질렀다.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크게 번 종목도 있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경영진의 행보 때문에 크게 잃은 종목도 있다.

비싼 수업료를 내가며 몸으로 배운 게 분할매수와 분할매도, 손절의 중요성이다. 특히 손절하기. 너무 크게 베팅한 상태에서는 손절하기가 정신적으로, 실질적으로 너무 어렵더라. 근데 생각해보면 이게 발산-수렴 싸이클에도 잘 적용되는 이론이다.

수렴은 여러가지 시도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나의 자원이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나머지를 포기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이미 쏟은 자원 대비 큰 이득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포기하는 것이니 손절과도 같다.

손절할 때 한번에 매도할 것인가, 분할매도할 것인가? 분할매도는 시간 + 에너지의 트레이드오프다. 분할해서 매도하면 대개 돈을 조금 덜 잃게 되지만, 그만큼 더 오랫동안 그 종목에 신경을 쓰게 된다. 고객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기능을 완전히 셧다운하지 않는 이상 계속 운영을 해야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해당 기능 사용자들의 만족감 + 그들이 지불하는 비용해당 기능 유지보수에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 한번에 손절을 해버리면 그 순간에는 마음이든 지갑이든 많이 아플 수 있지만, 나의 ‘시간과 에너지’라는 돈보다 더 한정된 자원은 아낄 수 있다.

그러면 분할매도가 무조건 불리한가? 당연히 그건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분할매도를 하든 하지 않든 내게 손해가 더 적어지도록 구조 설계를 하는 게 충분히 가능했다는 점이다. 나는 제대로 발산하지 않은 채 수렴부터 했기 때문에, 즉 몇 개 종목에 너무 빠르게 큰 비중을 실었기 때문에 한 종목이라도 실패하면 부분 손절조차 너무 아팠다. 내가 애초에 발산부터 했다면 - 여러 종목에 조금씩 실험하듯 들어갔다면, 개별 종목에서도 천천히 분할매수를 했다면 어땠을까? 부분 손절이든 전체 손절이든 손해의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의사결정하고 행동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스터디에서 주로 타겟팅하는, (일시적으로) 저평가된 시총 작은 주식들은 대개 일일 거래량도 많지 않다. 그래서 내 몸집이 너무 커지면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만큼 매도하기가 어려워진다. 빙하기에 설치류가 살아남았던 것처럼,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몸집을 줄여 손실 규모를 작게 유지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이는 애자일에서의 베이비 스텝과도 유사하다. 베이비 스텝을 밟으면 확신수준이 점점 올라가고, 뭔가 잘못됐을 때 쉽사리 되돌아갈 수 있다. 개별 종목을 살 때도 한번에 크게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분할해서 매수하면 내 몸집이 더 천천히 커지니 더 기민하게 움직일 수도 있고 손절 타이밍도 더 이르게 볼 수 있다. 상방이 작아질 것 같아 불안한 마음도 생기지만, 오히려 저점을 더 잡아서 상방이 더 커질 수도 있고, 너무 내려가면 내 판단 실수를 인정하고 아예 다른 종목으로 옮길 수도 있다.

바깥에서 오는 여러 기회(외부 옵션)에 나를 열어두자.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으려면 내게 여유자원(내부 옵션)이 충분히 있어야 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에너지든 여유 자원을 그저 들고 있다는 걸, 기회비용만큼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말자. 차분하게 베이비 스텝을 밟자. 그게 주식이든 내 삶에서 수렴하는 무언가든, 이 마음가짐을 잊지 않아야겠다.

발산, 수렴, 그리고 에너지 레벨

발산과 수렴을 제대로 하려면 에너지가 많이 든다.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니고(물리적 에너지), 여러 선택지 중 의사결정해서 손절하고(감정적 에너지), 이 모든 과정에서 깨어있으며 집중하고(인지적 에너지). 따라서 불확실한 상황이더라도 내게 충분한 에너지가 있지 않다면 쉽사리 발산하기보다는 일단 현상유지하면서 에너지를 차차 올리는 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심지어 에너지가 높은 상태에서 시작했더라도 에너지 레벨 관리를 잘 하지 못하면 순식간에 번아웃이 올지도 모른다. 나도 꽤 자주 겪는 일이고, 불과 며칠 전에도 또 한번 겪었다. 발산-수렴 싸이클에서, 평소에 에너지 레벨을 유지하고 상승하는 걸 어떻게 더 현명하게 할 수 있을까.

우선 거시적으로는: 분명 여러 활동 중 에너지를 더 크게 소모시키는 활동이 있고, 오히려 에너지가 차오르는 활동이 있을 것이다. 에너지를 소모하더라도 성과가 크게 나오면 괜찮을 수 있지만, 내 경험상 여러 시도를 하다 보면 에너지도 차오르는데 성과도 큰 활동이 분명히 한두 개는 생긴다. 가성비가 다른 활동과는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것이다. 이렇게 ‘비교할 필요 없는’ 것이 나오면 발산을 멈추고 그걸로 수렴하면 된다. 이때부터 나머지 주제는 쳐내거나, 줄이거나, 선택한 주제와 관련 있게 변형한다. 나에게는 ‘디버깅 전문가를 만나다’가 그랬다.

그다음 미시적으로는: 스스로에 대해 이해하고, 매일매일 나를 더 충전시켜주는 작은 습관을 지키면 된다. 운동하고, 산책하고, 감사의 마음을 담은 저널 쓰기. 매일 실천하는 이 습관들이 성긴 그물이 되어, 번아웃 위기가 왔을 때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장치가 되었다. 나는 사소하게 감사한 일들을 기록하다보면 에너지가 충전된다. 특히 ‘감사할 만한 일’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활동을 적당히 하고 나면 에너지가 더욱 충전된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고맙다는 말을 듣거나, 내가 고맙다고 말할 때 즐겁다.

발산, 수렴, 그리고 나

주식투자 스터디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내가 기존에 잘 알고, 잘 하던 것들과는 크게 다른 종류의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행하다 보니 스터디원들이 어떤 신호를 보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CTA할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오늘처럼 주식투자에서 배운 걸 삶에 가져올 수도 있고,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애자일의 원칙을 주식투자에 적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발산-수렴-발산에서 ‘CTA + 디버깅’에 수렴하게 된 것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원래는 ‘개발자’로서 하는 활동보다 ‘코치’로서 하는 활동이 더 재미있고 유의미하게 느껴져서 이쪽으로 완전히 전업할 생각을 조금씩 하게 됐다. 그런데 점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개발자로서의 정체성과 역량과 인맥을 버릴 필요가 전혀 없으며 오히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게 훨씬 유리하겠다는 느낌이 왔다. 하필이면 ‘디버깅 전문가’를 CTA 인터뷰 해야겠다고 생각한 게 그래서였다.

두가지 다 Effectuation 및 김창준님의 야생학습에서 배운 Bird-in-hand principle이 떠오른다. 내가 이미 가진 것에서 시작해서 확장하기, 새로 배운 것과 내가 이미 가진 것을 연결하기. 이럴 때 급격한 성장이 생기고, 성공하기도 훨씬 수월해진다. 하다못해 글쓰기에서도 내 찐 경험, 아이덴티티를 담았을 때 글의 매력이 확 살아나지 않는가.

기억하자. 모든 걸 나로부터 시작해서 발산하고, 다시 나로 돌아와서 수렴하면 된다. 그걸 점점 더 잘 하기 쉬운 구조를 설계하면 된다. 그게 삶의 밀도를 빠르게 높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