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L8, 코르카, 그리고 나
구글, 애플, 퀄컴 출신 엔지니어들이 모여, AI로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겠다는 비전으로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XL8. 여기에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 합류한 지 3년 반이 되었고, 이제 이번 주를 끝으로 떠나게 됐습니다.
다음 행선지는 AI 논문 읽기 도우미 문라이트와 AI 캘린더 트레이스를 운영하는 코르카입니다. 9월 초에 합류해 그동안 구상한 여러 서비스를 재밌게 만들어볼 예정이에요. 아직 입사 전이지만, 다른 코르카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200짜리 Claude Code Max 플랜을 포함해 원하는 모든 AI 도구를 (무조건 월 결제로) 즉시 지원받게 되어 든든하네요.
XL8과 함께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 코르카에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어떤 비전을 가지고 커리어를 꾸려나갈지 적어봤습니다.
XL8에 합류하기까지
약 4년 전인 2021년 가을. 지금은 유니콘이 된 한국신용데이터에서 프론트엔드 팀 리드로 잘 일하고 있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제 인생 목표는 "내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아졌다"는 말을 10여 년 뒤 자서전에 자신 있게 쓰는 것이었는데, 불현듯 10년 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 안전한 곳을 떠나 새 도전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여 여러 회사를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가장 중요했던 건 딱 하나였어요. '세상을 바꿀 트렌드에 가까이 가자.' 객체지향 프로그래밍과 GUI의 선구자인 엘런 케이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발명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습니다. 제가 미래를 잘 모르겠으니, 미래를 손수 발명할 수는 없더라도 미래 혁신을 이끄는 트렌드에 가까이 가는 게 유리하리라는 건 분명했죠.
저는 미래 혁신을 일으킬 다양한 트렌드(AI, 에너지, 농업, 실버, 로봇, 자율주행, VR, 블록체인 등등) 중 가장 현실화됐으면서도 다른 기술의 기반이 될 키워드가 AI라고 봤어요. 투자금을 끌어모았던 AI 회사들 중 일부가 유의미한 수익을 내기 시작한 시점이 딱 2021년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좋은 모델을 만들기 위한 자체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미 수익도 내고 있는 AI 회사를 탐색했는데 마침 지인에게 소개받은 XL8이 딱 들어맞았습니다. 그쪽에서 원하는 포지션도 프론트엔드 팀 리드였고요. 참고로 이 탐색 과정은 '당신은 이직 대상 회사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으시나요?' 라는 제목의 뉴스레터에도 담겨있습니다.
XL8에서의 3년 반
2022년 초 XL8에 합류한 뒤에는 MediaCAT이라는 미디어 번역 서비스를 바닥부터 만들었습니다. 원래 XL8은 번역 API만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저도 SDK 정도만 만들 줄 알았는데) API를 직접 연결할 역량이 있는 자막 제작 회사가 별로 많지 않더군요. 그래서 이들을 위한 SaaS가 필요해졌고, 덕분에 프론트엔드 팀 빌딩을 하는 동시에 PO 역할도 병행해서 서비스를 만들게 됐죠. 무척 힘겨웠지만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리서치팀에서 매주 열어주셨던 AI 최신 논문 리뷰도 귀동냥하면서 조금씩 AI 업계의 용어와 개념에 익숙해졌고요.
그러던 중, ChatGPT발 AI 혁명이 갑자기 시작됐습니다. 이건 의외로 XL8에게도 기회가 됐어요. 원래 전통 기업들이 가진 'AI로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한 의구심'을 이겨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해서 영업이 어려웠는데, ChatGPT 이후로는 이걸 빠르게 넘어설 수 있었거든요. 대신 ChatGPT보다는 훨씬 번역을 잘 했어야 했지만, 여기는 자신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회를 살리기보다는 위기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상용 LLM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면서 고객들의 눈높이가 '낮아지면서도 높아지는' 현상이 생겼거든요. AI가 내놓는 약간 이상한 결과물에 대중들이 익숙해지면서 '좋은 자막 번역'의 기준은 낮아졌습니다. 이런 평이한 수준의 자막은 LLM만으로도 잘 만들어낼 수 있으니, 전문 번역 서비스인 우리는 비용/시간/품질/UX 등에서 확실한 차별점을 보여줘야 했고요. 게다가 전 세계적으로 스타트업 투자가 얼어붙기까지 했습니다.
결코 쉽지 않았으나 몸집을 줄이고 기민하게 움직이며 어떻게든 헤쳐나갔고, EventCAT이라는 라이브 통번역 서비스도 출시하여 잘 꾸려나가던 차에, 코딩 에이전트와 바이브 코딩이라는 또 다른 물결이 찾아왔습니다. 여기에도 회사 입장에서는 전사적으로 Cursor와 Claude Code를 지원하며 잘 대응했지만 정작 제가 파도에 휩쓸렸어요. 어쩌다보니 패스트캠퍼스 바이브 코딩 강의가 너무 잘 되면서 여러 아이디어가 머릿속에서 폭발했지만, 강의에 집중하다 보니 나만의 서비스를 깎아서 내보낼 시간이 부족했거든요. 갈증이 너무 심해졌습니다.
계속 고민하며 많은 분들과 대화를 나눴고, 결국 얼마 전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것들을 배웠던 곳이라 무척 아쉽네요. 특히 CEO, CTO를 비롯한 모든 구성원들과 진심 어린 피드백을 편하게 주고받는 분위기가 가장 좋았습니다. 이미 스톡옵션을 행사해서 주주이기도 한 만큼, 앞으로도 XL8이 잘 될 수 있게 응원할 겁니다. XL8,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사족: 다국어 자막 만드시는 분들은 MediaCAT, 다국어 컨퍼런스 운영하시는 분들은 EventCAT 한번 사용해보세요. 업계 최상의 통번역 서비스임을 자부합니다.
코르카를 선택한 이유
제가 향후 커리어에 대해 고민하며 대화 나눴던 분 중 한 분이 코르카의 정영현 대표님이었어요. 사실 교육자이자 1인 개발자로서 창업하는 것도 강하게 고려하고 있었는데, 영현님이 "모든 조건을 맞춰줄 테니 코르카에서 제가 원하는 서비스를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주셨거든요. 영현님과 통화도 하고, 사무실도 방문하여 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코르카가 굉장히 매력적인 팀이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코르카의 특징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AI 앱을 만들고 과감히 종료하는 사이클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코르카 내에서 지금까지 30여개의 서비스가 생겼지만 현재 살아남은 AI 앱은 '문라이트'와 '트레이스' 둘뿐이라고 들었어요. 둘 다 코르카 사내에서 필요해서 만든 서비스가 커진 거고요. 그리고 올해부터는 이 움직임을 더 가속화하기 위해 작은 AI 앱을 개발하는 1-2인 팀 다수를 운영하는 형태로 조직 개편 중이며, 저 또한 그런 팀 중 하나가 될 예정입니다. 얼마 전에는 사내 클로드 코드 해커톤도 열었고, 글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전 직원에게 모든 AI 도구를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했다는 것도 매력적이에요.
저는 다른 조건들도 좋지만 코르카가 AI 앱을 유료 마케팅 거의 없이 GTM(Go-To-Market)해온 경험과 에이전트 개발 노하우를 흡수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큽니다. 바이브 코딩이 '구현'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크게 낮춰주긴 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을 성공적으로 선보이는 데에는 여전히 많은 노력과 노하우가 필요하다고 보거든요. 저 또한 여러 앱을 만들고 싶기에, 이 부분에서 1인 개발보다는 팀의 도움을 받는 데 큰 이점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여기에도 AI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요.
그리고 'AI 시대에 주니어 개발자가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성장하기 위한 방법'을 주제로 한 책을 인사이트 출판사와 함께 구상 중인데요. 이러한 학습법을 코르카 주니어 개발자 분들께 실제로 적용해본 스토리를 담으면 책 집필에도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영현님은 코르카에 3년차 이하 젊은 피가 많기 때문에, 이런 AI Transformation과 멘토링을 지원하는 것 또한 시니어로서 제게 바라는 역할이라고도 말씀하셨거든요.
앞으로의 커리어 계획
XL8과 코르카 사이 제게 주어진 시간은 50일 정도입니다. 이 기간에는 그동안 벌여뒀던 일들을 조금씩 수습하려고 해요. 앞으로 단순한 기업 교육은 좀 줄이고, 크게 3가지 방향성으로 움직일 계획입니다.
- 효과적인 바이브 코딩 워크플로우(도구, 프로세스, 시스템)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개발자와 비개발자 모두를 위한 방법론으로 발전시켜보자.
- 그 워크플로우를 이용해 실제로 내 문제를 해결하는 앱을 여러 개 만들어보자. 대부분은 바이브 코더와 주니어 개발자들을 위한 앱이 되지 않을까.
- 그 워크플로우와, 내가 만든 앱과, 인지작업 분석(CTA)을 비롯한 효과적인 학습 및 훈련 전략을 이용해 기업과 개인(특히 주니어 개발자)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내보자.
당연히 50일 동안 이 모든 걸 할 수는 없으니 코르카에서 계속 이어가려고 해요.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고, 그 모든 과정을 블로그, SNS, 책을 통해 기록하여 공유할 예정입니다.
사실 이 글은 2025년 상반기 회고를 쓰다가 분화되었습니다. 원래 'AI 시대에 개발자가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방법' 정도의 제목이었는데 여기서 또 분화되어 이런 회고와 포부를 담은 글이 되었네요. 상반기 회고와 커리어에 대한 글도 빠르게 마무리해보려고 합니다.
Member discussion